피카소, 고갱, 루벤스가 돈을 대하는 방식

직업 중 가장 빈부격차가 심한 분야는 예술과 스포츠 분야이다. 이곳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돈을 다 끌어 모으지만 실패한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예술 영역은 그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했다고 해서 꼭 경제적 보상도 함께 주어지는 분야가 아니다. 특히 미술 분야가 그렇다. 대부분 화가들은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작품은 그들이 죽은 후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는다.

피카소와 고갱 루벤스 모습
왼쪽부터 피카소, 고갱, 루벤스


그러나 이런 미술 분야에서도 재벌 부럽지 않은 큰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피카소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예술가이기 전에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고 입을 모은다. 피카소 이전의 미술 분야에 있어 마케팅 귀재로는 루벤스를 꼽는다. 

반면 고갱과 고흐는 천재성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대부분 예술가처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겪었던 인물이다. 생전에는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팔아보지도 못했다. 

왜 동일하게 신으로부터 뛰어난 재능을 받았음에도 누구는 그것을 부로 연결시키고, 누구는 그것을 경제적 성취는커녕 기본적인 생계 유지의 수단으로도 연결시키지 못했을까? 

오늘은 피카소, 고갱, 루벤스가 자신의 일을 바라보고 돈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재능이 경제적 부의 창출로 연결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피카소, 누가 이 자를 예술가라 했는가?

스페인이 낳은 현대미술계의 황제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는 20세기는 물론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 중에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3만점이 넘는 엄청난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조각과 도자기도 빗었으며 커튼과 발레복을 제작하기도 했고, 시와 희곡을 창작하기도 했다.

그의 화풍은 실로 너무도 다양하여 입체주의와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신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변화무상했다. 60대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사상적 변화도 많았고, 수많은 여성들과 만남을 가졌으며 공인된 7명의 여성과는 지속적인 동거와 결혼, 이혼을 반복했다. 

피카소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풍요롭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하루만에 작품을 완성하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속도는 3만 점이 넘는 작품을 세상에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도대체 피카소가 얼마나 부자였는지는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영국의 미술평론가 존 버거에 의하면 피카소는 28세 때부터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38살에 이미 부자가 되었으며, 65세 이후에는 백만장자였다고 한다.

실제 그는 28세 때부터 그가 식사를 할 때 앞치마를 두르고 모자를 쓴 하녀가 식사 시중을 들었고, 38세에 파리 최고 상류사회에 속하는 지역에 거대한 저택으로 이사했으며, 50세 무렵엔 17세기에 지은 부아젤루 성을 별장으로 구입할 정도의 갑부가 되었다.

 

피카소, 돈을 잘 아는 천재 예술가

존 버거에 의하면 피카소가 경제적 성공을 거두는 데는 운도 크게 작용했다. 1950년대 미국 정부가 유럽 미술의 수입을 장려하기 위해 미국 미술관에 미술품을 기증하는 사람들에게 ‘소득세 감면’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자 영국은 자국의 미술품 유출을 막기 위해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지불하는 제도를 실시하게 된다. 미술품이 부자들의 최대 절세 상품이 되자 세계의 미술품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피카소와 이비뇽의 여인들
왼쪽은 그림 아비뇽의 여인들, 오른쪽은 피카소


세금 제도 변화와 함께 세계 2차대전 이후 경제적 부흥도 미술품의 가격 인상의 원인이 되었다. 전후 경제 복구 사업을 위해 국가에서 막대하게 풀린 돈들이 미술품 경매 시장에 들어와 미술 작품의 가격을 크게 올린 것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술품 전문 투자 그룹이 생긴 것이다. 미술품의 경제적 가치를 알아본 투자전문가들이 남아메리카의 철도와 볼리비아의 주석, 실론의 차 농장 대신에 미술품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술가들에게 좋은 환경이 펼쳐졌지만 그 호재를 경제적 수익 모델로 잘 이용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피카소는 달랐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과 환경적 운만 좋은 것이 아니라, 투자적 안목도 뛰어났다. 피카소는 평소대로 열심히 자신의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상시적으로 미술품 투자 그룹들을 상대로 자신의 제작 현장도 보여주고, 작품에 대한 설명에도 늘 열심이었다. 자신의 그림을 팔 때는 더 높은 가격에 작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미술 투자가들 간에 경쟁을 붙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상건 작가는 『부자들의 개인도서관』에서, 피카소의 성공 요인은 그가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집중하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돈이 될 만한 그림을 잘 그려냈으며, 자신의 그림을 보는 안목을 이용해 잠재성 있는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사서 비싸게 되파는 방식으로 많은 부를 창출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피카소가 경제 변화에 늘 능동적으로 대응했다는 점도 그가 성공한 이유가 되었다. 그는 특정 화풍에 고정되지 않았고 늘 예술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듯이 경제적 흐름 변화에도 민감하게 대응했다. 그는 늘 유행의 선두에 있었다. 큰 부자는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잘 만나야 하며,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고갱, 돈을 알면서도 재능을 사장시킨 천재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너무나 유명한 폴 고갱(Paul Gauguin)은 서머셋 모음의 『달과 6펜스』의 모델이기도 한 예술가이다. 

그는 언론인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추방되어 어린 시절을 페루에서 보냈고, 프랑스 오를레앙에 돌아와 졸업 후 젊었을 땐 도선사가 되고자 했고, 해군으로 군 생활을 마친 후 파리의 증권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 때 그의 나이가 23세였다.

그는 11년 동안 성공한 파리지행 증권 중개인이 되어 잘 나가는 청년기를 보냈다. 1879년 그의 연간 수입은 3만 프랑으로 2008년 기준 12만 5천 달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억 5천만 원이 넘는 액수이다. 그야말로 억대 연봉자로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두고도 건실하게 가정을 이끌 수 있는 꽤 부유한 삶을 살았다.

폴 고갱과 그의 그림 아레아레아
왼쪽은 그림 아레아레아, 오른 쪽은 고갱의 모습

그러나 고갱이 전업 화가로 전향한 후 삶은 궁핍해진다. 그는 돈도 가정도 모두 잃게 되었다.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지고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이혼 사유는 돈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43세에 그는 문명화된 유럽이 아닌 원시 자연의 세계를 화폭에 담고자 타히티행을 선택한다. 다음해에 있을 파리 드루오 호텔에서 열리는 미술 경매에 타히티를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체의 유럽 문명이 닿지 않는 이상적 사회를 화폭에 담아 전시하면 큰 성공을 거둬 명성과 큰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타히티는 이미 유럽 문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타히티 수도 파페에테는 유럽의 땅과 같았고 원주민들은 유럽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에드몽 드 보비와 같은 사진사의 연출 사진을 참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3년후 프랑스로 돌아와 전시회를 열었다. 다행히 1894년 듀랑-루엘 전시회에서는 40점 중 11점이 팔려 조금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전시회에서는 작품을 팔지 못했다.

1895년 다시 타히티로 돌아간 후 그는 유럽 문명이 닿지 않는 원시세계를 꿈꾸며 마르키즈 제도로 활동지를 옮기지만 그곳도 타이티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파리의 미술품 중개사는 그에게 타이티의 잃어버린 낙원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달라고 계속 재촉했지만 그는 풍경과 인물들을 그렸다.

그는 그곳에서 파리에서 다친 발목과 손발에 생긴 습진과 여러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또한 
타히티에서 다른 화가와 소송에 결부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등 비탄과 고통 속에서 살다가 1903년 비운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갱은 왜 돈을 벌지 못했나?

고갱은 시장과 그림의 경제적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증권사 중개인으로 11년간 성공적으로 보냈고, 그는 미술품 경매를 통해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예술을 경제적 수단으로 연결하지 못했다. 그는 유럽의 문명사회에 대한 회의감이 심해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거부했고,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찼다.

그의 창작 공간인 타히티와 마르키즈 제도는 당시 미술품의 주된 거래 시장인 유럽과 지나치게 멀리 위치하고 있었다. 피카소가 유럽에 살며 미술시장과 당대 유행 화풍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음에 비해 고갱은 시장과 홀로 떨어져서 자신만의 화풍과 표현방식만을 고집했다.

그는 미술품 중개인이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요구했을 때에도 번번히 그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그리고 수차례나 그림의 납부 기일을 어겼다. 그는 계약당사자로서 신용이 없는 화가였다.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 해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특히 그 작품에 기꺼이 돈을 투자할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면 예술품을 경제적 부로 연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남들이 잘 그린 그림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림이 혼자만의 낙서가 아닌 화랑과 박물관에 전시되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미술품 시장이 돌아가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루벤스, 돈 버는 예술가란 어떠해야 하는가?

피카소 이전 미술품 시장이 무르익지 않았을 시절, 예술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생계를 세워나가기 어려운 시절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성공적으로 살았던 인물이 있다. 바로 독일 태생의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이다.

영국의 미술평론가 오브리 메넨은 루벤스를 일컬어, ‘영민한 사업가이자 뛰어난 마케터’라고 지칭했다. 

그는 매우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그는 유럽 전역의 귀족과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알려진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고, 그는 화가일뿐 아니라 고매한 인문학자이기도 했고, 스페인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1세에게서는 기사 칭호를 얻어낼 정도로 수완이 좋은 외교관이기도 했다.

루벤스와 그의 그림 삼손과 데릴라
완쪽은 그림 삼손과 데릴라, 오른쪽은 루벤스의 자화상


그는 예술가들이 마케팅기법에 대해 무지하던 17세기에 이탈리아로 건너가 오늘날의 시장조사와 같은 미술품 경제조사를 실시했다. 그 시대에 후원자가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지불하는가에 대해 면밀히 연구했다. 

그리고 당시 전형적인 그림 사업 방식인 궁정화가가 된다. 그런데 그는 돈에 대해서 만큼은 태도가 확실한 화가였다. 처음 만투아 영주의 궁정화가가 되었는데, 그 영주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돈을 지불하지 않자 루벤스는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고 그날로 그를 떠났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시 상종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루벤스는 현대적 의미로 고객관리와 마케팅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당시의 화가들은 지위가 낮았고, 그의 고객들은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고객들은 돈을 지불하는 것을 쉽게 잊곤 했다. 이러한 최고 권력자들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거는 것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고객들의 성향을 철저히 분석해서 그에 적합한 방법으로 대금값을 받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호화 주택이 있는 스튜디오로 부자 고객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시연하고, 비서들을 통해 좋은 시와 좋은 책을 낭독하도록 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부자들이 쉽게 돈을 지불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끼워팔기’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다. 루벤스는 여러 영주들에게 외교적인 업무 부탁도 많이 받았는데 루벤스는 그때마다 그 기회를 그림을 판매 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그림을 판매할 때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만 중시하지 않았다.

유럽 귀족들은 쓸만한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화가들이라면 자존심 상해 그 요구를 거절했겠지만 그는 쾌히 유럽 전역을 다니며 골동품과 예술품을 사들여 고객들이 원하는 미술품을 판매했다. 그는 고객들이 어떤 작품을 원하는지 그 고객 취향을 최고로 중시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돈을 많이 벌수록 구설수의 대상이 되었지만 루벤스는 돈을 많이 벌수록 명성과 칭송이 높아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루벤스는 항상 겸손하고 고객 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개인도서관』을 쓴 이상건 작가는 루벤스의 성공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루벤스는 무슨 일을 하든 돈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열정페이가 난무하는 예술 분야에서 일의 대가로 반드시 돈을 받아야 한다는 명료한 인식을 가진 예술가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비즈니스에서는 고객들에게 가격 이상의 만족과 가치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데, 루벤스는 그런 점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고 본다. 그는 귀족 한명 한명의 취향과 기질을 분석해서 그들이 가장 감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억지로 돈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꺼낼 수 있도록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마케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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