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확언은 운명의 힘도 역전시킨다

부자들은 말을 아낀다. 부자들은 언어생활에 신중하다. 생각한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창조력과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말이 씨가 된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을 익히 들어 봤을 것이다. 
사실 말은 논리력과 설득력, 순간의 재치와 화법 등의 말솜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 자체에 힘이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의 인생과 운명은 자신이 내뱉은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야고보서에는 ‘혀가 배의 키’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자동차의 운전대처럼 혀가 내뱉은 말이 자신의 운명이 가는 방향을 조종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자신이 한 말에 구속된다.  

아이들이 서로 마주보며 외치는 장면
말의 힘


즉 언어에는 자기충족예언 효과가 있어서 말한 대로 실현된다. 다만 봄에 뿌린 씨앗이 자라나 거둘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 한 말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언어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는 실례가 바로 가수들의 인생들이다. 가수들의 세계에는 자신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인생이 흘러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랫 가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가수는 노랫 가사에 감정과 혼을 실어 그것도 반복적으로 목이 터져라 부르기 때문이다. 가수들의 인생을 살펴보면 자신의 말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알 수 있다.  

수년전 한국노랫말연구회에서는 가수 100명을 연구한 결과, 그 중 91명이 자신의 히트곡의 가사와 같은 운명을 살았다고 한다. 슬픈 노래를 부른 사람은 슬픈 인생을, 희망 찬 노래를 부른 사람은 희망 찬 인생을 살았다. 그렇다면 가수들의 노래가 그들 인생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수들의 생애를 통해 말의 위력을 확인하라

‘세상은 요지경’이란 노래와 이판사판 춤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MBC 탤런트 출신 신신애는 앨범 발표 이후 여러 건의 사기를 당해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사기를 친 사람에는 전 매니저도 있고, 절친과 목사님과 관계된 인사까지 있다고 하니 정말 인생은 요지경 속이다.

그래서인지 이 노래의 가사에는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신애는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을 계기로 그야말로 짜가가 판을 치는 세상과 엮이게 된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기 전의 신신애는 세상의 사기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신신애와 산장의 여인 수덕사의 여승 앨범 자켓
세상은 요지경(좌)  산장의 여인(상)  수덕사의 여승(하)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송춘희는 여든이 넘은 나이까지 결혼 하지 않고 불교 포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가 답십리에 교회를 건립할 정도로 대대로 독실한 보수 개신교 집안이었다.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엔 불교에 대해선 하나도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덕사의 여승’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녀는 하루에 극장 다섯 곳에서 4번씩 20번을 부르고 또 야간업소 8군데를 돌았다고 한다. 연습까지 합치면 이 노래를 부른 횟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그녀는 불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고 현재는 백련화란 법명을 받고 조계종에서 인정한 불교가수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산장의 여인’을 부른 권혜경은 그 가사 내용처럼 심장판막증과 결핵 암 등으로 요양을 가게 되었고 산장에 집을 짓고 수도승처럼 독신으로 쓸쓸하게 살았다. 그녀는 재소자들을 위한 위문공연을 많이 다닌 가수로 유명했다. 그녀에겐 자식이 없지만 수인들 사이에서는 어머니로 통했다. 인생의 말년에는 치매로 인해 어려움 겪었는데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까지 생겨 그를 기억하는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권혜경이 임종을 맞이한 2008년 5월24일 밤, 국민가수인 조용필이 서울잠실종합운동장에서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 자신의 애창곡이라면서 권혜경의 ‘산장의 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산장의 여인’은 평소 조용필의 애창곡이지만 무대에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조용필도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참 묘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패티김과 김옥윤 부부 바다가 육지라면 노사연 앨범 자켓
패티김과 김옥윤(좌) 바다가 육지라면(상) 노사연(하)


유행가의 노랫 가사들은 가수들의 부부관계에도 많은 영양을 끼쳤다. '멀리 있어도’를 부른 고대법대 출신 가수 김상희는 이 노래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몇 년간 떨어져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와 ‘사랑이란 두 글자’를 신혼 때 불렀던 패티김과 길옥윤 부부는 ‘이별’이라는 히트곡이 발표된 지 1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인기 가수 조미미는 ‘먼데서 오신 손님’과 ‘바다가 육지라면’이 히트를 치면서 재일 교포 사업가 안성기씨가 바다를 건너와 청혼을 하는 바람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완전히 모세가 홍해를 가른 기적이 나타난 것인지

국민 인증 노처녀 가수 노사연은 1989년 발표한 ‘만남’이 1992년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 인기상을 받으며 가수로서 황금기를 누렸는데,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라는 가사처럼 영원히 노처녀로 지낼 것 같았던 노사연은 1994년에 이무송과 결혼을 하게 된다. 게다가 노래 가사에 ‘후회하지 마라 돌아보지 마라’라는 가사가 들어 있어서 그런지 그동안 2만 번 넘게 노사연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들었던 이무송은 지금도 끄떡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유명했던 가수들이 그가 부른 노래 가사처럼 세상을 떠난 사연들이다.

영시의 이별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김정호의 앨범과 윤심덕과 김우진 사진
영시의 이별(위 좌)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위 우) 김정호(아래 좌) 김우진 윤심덕(아래 우)


이것이 정확한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안개낀 장충단공원’을 부른 가수 배호는 유작으로 ‘0시의 이별’을 발표했는데 공교롭게도 0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있다. 평소에도 신장질환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가을비를 맞아 몸살에 걸렸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세브란스병원에 후송되었으나 회생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아리고개를 넘는 구급차 안에서 세상과 이별했다고 한다. 그런데 배호의 데뷔곡 자체가 ‘굿바이’였고 마지막 앨범곡은 ‘0시의 이별’과 ‘마지막 잎새’였는데 모두 죽음을 암시하는 곡이었다.

배호와 함께 당대 최대 라이벌 구도를 이룬 차중락 역시 서른도 못되는 27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큰 아쉬움을 남겼다. 밴드 ‘키보이스’ 리드보컬 출신의 차중락은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된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었다. 인기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 무대에서 고열로 쓰러졌다. 낙엽이 사라지는 11월에 사망한 차중락의 첫 히트곡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고 마지막 유작은 ‘낙엽의 눈물’이다.


호소력 짙은 성향으로 인기를 모은 가수 김정호는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라는 가사처럼 33세라는 짧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을 하며 진짜 팬들을 두고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 노래의 제목은 ‘님’인데, 그의 죽음 이후 동료들이 모여 만든 추모 앨범에서 ‘내 사랑 내 곁에’의 가수 김현식이 이 ‘님’을 애절하게 부른다. 그리고 김현식 역시 얼마 후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대중가요인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은 이 노래를 불렀다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윤심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였다. 그녀는 생애 마지막 해에 일본에서 계획된 음반 녹음을 마치고 특별히 예정에도 없던 한 곡을 더 추가했다. 그 곡은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으로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작성한 ‘사의 찬미’이다. 

이 노래를 녹음한 후 그녀는 극작가 김우진을 일본으로 불러내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에 함께 오른 후 현해탄에 함께 몸을 던져 스물아홉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남인수와 양미란 사진 그리고 목포의 눈물과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앨범 자켓
목포의 눈물(위 좌), 남인수(위 우), 양미란(아래 좌),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아래 우)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노래 가사처럼 눈물 많은 삶을 살았다. 여름에 목포를 방문한 사람들은 목포에 얼마나 많은 비가 오는지 겪어보았을 것이다. 

이난영은 6.25 전쟁 때 남편 김해송을 잃었고, 전쟁 통에 일곱 자녀와 악단을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졌다. 그녀는 딸들을 모아 김씨스터즈를 만들고, 아들들을 모아 김보이즈를 결성하여 미국에 데뷔시키는 등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는 말년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부른 유명 가수 남인수를 만나 병수발을 하였는데 결핵에 걸린 남인수는 병상에서 ‘눈 감아 드리오리’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남기며 이난영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남인수의 죽음 이후 이난영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고 자식들을 만나러 미국을 다녀온 후 서울 자택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흑점’의 가수 양미란은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랫말을 연구하는 이들은 ‘흑점’의 가사 중 ‘태양의 흑점처럼 어두운 내 가슴 말해주오’의 대목이 골수암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인 정민섭씨도 몇 년 뒤인 1987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부른 싱어송라이터 장덕은 오빠인 장현이 설암으로 투병 생활 중에 이 곡을 작곡하게 되었는데, 당시 병간호를 하며 병마와 싸우던 장현의 심정이 이 곡에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그대여 안녕~’으로 끝나는 가사는 곳곳에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장덕은 당시에 오빠의 병간호와 여러 작곡 일들로 바쁜 가운데 수면제를 과다복용하여 사망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동생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장현 역시 6개월 후 암으로 사망하였다.  

음악과 삶, 가사와 삶이 구분되지 않는 가객이라 일컬을 수 있는 위대한 가수 김광석과 김현식 모두 그가 부른 가사 대로 삶을 마감했다. 

유재하 김광석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 김현식


김광석은 음악평론가로부터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된 ‘서른 즈음에’를 발표하고 그 가사처럼 서른 하나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장애아로 출생한 그의 외동딸인 김서연 양도 2007년에 폐질환으로 사망하여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주었다.

자신의 지병인 간경화로 죽기 이틀 전까지 음반을 만들었던 김현식의 노래에는 죽음을 암시하는 대목들이 많다. 서른 둘 너무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지금도 회자되는 많은 명곡들을 남겼다. 그의 첫 히트곡인 ‘사랑했어요’ 그리고 ‘내 사랑 내 곁에’, ‘떠나가 버렸네’ 그리고 마지막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과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애잔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김현식의 죽음에는 후배이자 동료였던 유재하와의 인연이 화제가 되고 있다. 유재하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그 유작이 큰 인기를 모았는데 생전에 김현식과 매우 친했던 사이로 알려진다. 유재하의 곡 중에서 ‘우울한 편지’가 죽음을 예고한 노래였다고 하는데, 유재하는 1987년 11월 1일 사망하였고 그가 죽은 후 정확히 3년 후인 11월 1일 김현식이 사망하여 둘은 기일이 같다.


반면에 긍정적인 가사 덕을 본 사례도 있다. ‘세월이 약이겠지요’와 ‘쨍하고 해뜰 날’을 부른 송대관은 그 가사대로 ‘세월이 약이겠지요’ 첫 히트 이후 오랜 기간 인기 없는 설움을 겪고 살다가 ‘쨍하고 해뜰 날’로 인기몰이를 했다. 그의 인생은 쥐 구멍에도 해뜰날이 있다는 속담처럼 희망찬 ‘해뜰날’이 도래한 것이다.


송대관과 해뜰날 앨범
송대관 해뜰날



어느덧 70대 중반이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트로트 4대 천황의 한 명으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는 송대관은 항상 밝고 긍정적이며 희망찬 내일을 노래하는 가수로 유명하다.

과거에 우리 대중가요들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슬프고 애달픈 정서가 주도했다. 그래서인지 과거에 인기가 있던 가수들은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사례들이 많다.

그러다가 최근 대중문화의 판도가 흥겨움과 즐거움으로 바뀐 이후 흥겨운 가사와 즐거운 내용들을 부른 가수들은 이전 가수들처럼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가수들은 수많은 곡을 부르고, 곡 중에는 슬픈 곡조도 있지만 즐겁고 경쾌한 곡들도 있는데, 왜 유독 히트곡의 가사들이 가수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걸까?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취입하기 위해서는 같은 노래를 최소한 2~3천 번씩 반복한다고 한다. 더구나 히트곡의 경우에는 다른 곡보다 그 노래를 수십 배 이상 자주 오랜 기간에 걸쳐 부르게 된다. 

그 가사를 수백 수천 번씩 부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사의 내용이 잠재의식 속에 새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 가사의 내용을 사실로 믿은 잠재의식은 삶에서 그 가사 내용에 부합하는 현실을 끌어당기게 되고, 결국 가수의 생애를 가사의 내용처럼 현실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지금 하나도 되는 게 없는 인생이라면 혹시 자신이 과거에 이런 슬픈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자신이 부정적인 말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에 저주의 걸림돌을 깔아놓지 않았는지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노랫말 연구가들은 노래방에서 부르는 자신의 18번과 애창곡 중에서 사랑과 이별, 슬픔과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없는지 점검하라고 말한다. 혹여나 반복적으로 그 곡을 부르게 되면 인생에서 나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끌어당김의 법칙 연구자들은 지금의 현실이 과거 수년에서 수십 년 걸쳐 자신이 잠재의식에 뿌렸던 씨앗들이 자라면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슬픈 노래는 듣지도 보지도 말자. 부정적인 소리, 내용은 듣지도 말자. 그리고 가수가 그 가사를 수천 번 반복해서 열과 성을 다해 반복해 부르는 것처럼 자신의 꿈과 바램을 확언으로 만들어 수천 번씩 반복하여 되뇌이라.

슬픈 유행가 가사의 힘이 이 정도일진데, 열렬한 꿈과 바램을 담은 긍정 확언의 힘 역시 이 노랫가사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확언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사례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마인드파워 조성희 대표가 쓴 『더 플러스』에 수록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다. 30대 여사장님의 인생스토리로서 책 내용을 필자의 방식대로 요약했다.

 

한강이 마르는 한이 있어도 당신 돈은 마르지 않으리라

조성희 대표를 찾아온 어느 30대 여사장님의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가명으로 선희씨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선희씨는 대구에서 사업을 하시는 어머니의 외동딸로 스물 다섯 나이까지 큰 어려움이 없이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녀가 전공인 미대를 막 졸업한 직후 터졌다. 어머니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8억원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살아생전 돈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선희씨는 빚쟁이들이 쳐들어와서 집안 여기저기에 딱지를 붙이고, 가족들을 거리로 쫓아냈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가까스로 안고 나온 강아지의 이마에도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했어도 월급쟁이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형제자매 아무도 없이 달랑 어머니와 자신뿐인데, 월급에도 차압이 들어왔기 때문에 대구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날로 그녀는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뭘 해서 어머니의 빚을 갚을까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마침 동대문시장을 지나다가 의류 매장들 앞에 사람들이 미어터지게 많은 것을 보고 의류 매장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동대문시장
동대문시장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올라와 몸뚱이 하나만 믿고 시작한 서울 생활은 고생 그 자체였다. 지하 사글셋방을 이리저리 옮겨다녔는데 여름 장마 때마다 홍수가 나서 가재도구가 쓸려 나가는 경험을 했지만 돈이 없어 방을 옮길 수 없었다고 한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빚을 얻어 동대문시장에 첫 소매매장을 얻었다. 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한 끝에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자신감을 얻어 지인들과 함께 동업으로 도매매장도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이 맞지 않은 동업자들과의 관계는 분쟁의 연속이었고, 뜻하지 않게 명도소송에 휘말려 1년 넘게 잠도 자지 않고 모았던 돈 3억원이 석달만에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이 때 선희씨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소매매장에 집중하지도 못했는데, 때마침 인터넷쇼핑몰이 뜨기 시작하면서 소매매장도 폐업을 맞게 되었다. 



선희씨가 정신을 차린 후에 확인 해 보니 수중에 남은 것은 달랑 보증금 700만원에 월세 35만원 짜리 방한 칸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빚은 손도 못 댄 채 그대로 있었다.

대구에서 혼자 빚쟁이에게 시달리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해서는 이대로 망연자실하고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먹은 선희씨는 마침 의류 사업을 시작한 친구의 아버지와 함께 동업을 하게 된다. 

또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 한 두 시간만 자면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수익배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선희씨는 사장님으로부터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게 되고, 작업장 옆의 방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선희씨는 다시금 하루 아침에 집도 절도 없고 돈 한 푼 없이 어디에도 오갈 데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남들처럼 다리 뻗고 자본 적 없이 일만 열심히 했건만 수중에 떨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지금 상황은 처음 상황보다도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번 돈은 모두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가까운 사람들과는 사이가 틀어졌고, 욕은 욕대로 먹었고, 상처는 상처대로 남은 상태였다. 

일이 계속 안 되다 보니 그녀의 성품 역시 변했다고 한다. 심한 좌절을 겪은 선희씨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주위 사람들을 넓은 마음으로 품어줄 수 없었다고 한다. 

성품은 더욱 까칠해져가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감정은 완전히 밑바닥을 모르고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이 때 죽음에 대해 500번도 넘게 생각했다고 한다.

바로 그 즈음, 친한 언니가 기막히게 잘 본다는 무속인을 소개해준다. 선희씨는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를 잡는다는 심정으로 언니를 따라 나서게 된다.

점집
점집

용하다고 소문난 그 무속인은 금수저로 태어난 친한 언니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음 무탈한 인생이네. 돈이 아주 많아. 한강에 물이 마른다고 해도 당신에게 돈은 마르지 않을 거야!”

반면 선희씨의 사주를 보고는 깊은 한숨을 크게 쉬고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침묵 끝에 한 마디를 던졌다.

“힘드네. 힘들어. 사주에 돈이 없어.”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무속인으로부터도 뜻밖의 말을 들은 선희씨의 마음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녀를 돕는다고 무속인에게 데려온 친한 언니 역시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나 보다. 언니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시 도전해보라며 오랫동안 모았던 적금을 깨서 선희씨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선희씨는 언니로부터 받은 돈을 밑천 삼아 ‘이번에도 망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다시 일어섰고, 기적적으로 1년만에 8억원의 돈을 다 갚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몇 십억이 넘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자산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희씨는 그 많던 8억원의 돈을 갚고, 수십억 원의 자산가가 될 수 있었을까? 당시 그녀에겐 돈도 없었고, 그녀의 사주에는 재성도 없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사실 그녀의 삶에 일어났던 일들은 무속인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사주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모아도 돈이 다 새고, 아무리 벌어도 돈이 모이지 않는 현상이 줄곧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데, 무속인을 찾아갔던 일을 전후 하여 그녀의 인생은 180도 달라지게 된다. 도대체 그녀에겐 그날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후에 선희씨는 자신이 빚을 갚고 사업에 성공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선희씨는 당시 상황이 너무 다급했고, 간절했기 때문에 무속인에게 들은 그 충격적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뒤집어 버렸다고 한다.  
 
선희씨는 친한 언니에게 무속인이 해준 말을 자신에게 해준 말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그 말을 그 이후로 쉴 새 없이 되뇌였다는 것이다.

“한강수가 말라도 내겐 돈이 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되풀이 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그녀에게 그 말이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 수중에 돈이 마르지 않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한강
한강


조성희 마인드스쿨 대표는 세상은 무속인이 한 말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음 속에 아로새긴 말대로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무속인을 찾아가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긍정 확언으로 만들어 100번 더 외치라고 충고한다.



필자는 명리학을 공부해 보아서 인간의 사주팔자라는 코드가 결코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태어난 시점에 결정되는 사주팔자는 우연이 아니라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카르마와 은덕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운명이란 ‘정해진 미래’가 아니다. 운명이란 ‘운이 명한 것’으로 운을 거스르는 것은 쉽진 않지만 가능한 것이다.

여러분도 똑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태어난 시간까지 같은 쌍둥이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예전에 김영삼 대통령과 사주가 같은 사람이 서울역 노숙자로 살아가는 것이 방송에 방영되어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정신이고 그 정신을 응축한 것이 바로 긍정의 확언이다. 

운명에 굴복하기 싫거든 긍정의 확언을 반복하라. 
“나는 운이 좋다”
 
조성희 대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이 확언을 공공재로 세상에 내놓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에게 이 말을 들려주라고 한다.

“한강에 물이 마른다고 하더라도 너의 인생에는 결코 돈이 마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너는 축복받은 존재이니까. 너는 부자로 태어났어. 너는 행운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어.”

확언의 힘을 믿어야 한다. 일본의 최고의 납세부자이자 아마 젊은 층에게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사이토 히토리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운이 좋다. 나에겐 행운이 늘 따른다”

사이토 히토리는 이 말을 하루에 천 번씩 외친다고 한다. 반면에 결코 입에 담지 않는 말이 있다. 그는 ‘불경기’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은 불경기이다.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후 20년이 되었다가 이젠 ‘잃어버린 30년’이 되고 있다. 일본이 불경기라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불경기란 말을 입에 담지 않은 사이토 히토리는 다른 경쟁사들이 축소되고 구조조정이 되는 상황에서도 불경기를 모르고 그의 회사는 매번 성장했다.

사이토 히토리는 불경기라는 외부 환경보다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긍정의 확언은 불경기의 파도를 넘을 수 있다.

자, 그럼 오늘은 조성희 대표가 선물로 준 확언을 반복하며 글을 마치겠다.

“나는 운이 좋다. 나는 부자로 태어났다.
한강에 물이 말라도 내 돈은 마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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